한국의 모교회인 새문안교회의 자랑 중 하나는 일제 강점기에 민족과 나라를 위해 헌신한 인물을 배출한 데 있다. 안창호, 김규식 등은 그 대표적 인물에 속한다. 그러나 서병호(徐丙浩, 1885~1972) 또한 이들에 버금가는 신앙인이며 독립운동가, 교육자였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열강에 시달렸던 구한말, 국권을 잃었던 일제 강점기, 그 후 해방과 분열의 격동기였다. 어려운 시기에 굳건한 신앙을 바탕으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그의 삶을 통해 기독교인의 역할과 사명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를 갖고자 한다. 6월은 호국선열의 달이므로 더욱 의미가 있다고 본다.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 독립운동가 집안과의 결혼

 송암(松岩) 서병호는 1885년 황해도 장연군 송천리에서 서경조의 2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큰 아버지 서상륜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하기 전 한글번역 성경을 만주에서 들여온 신앙의 선구자였다. 아버지 서경조는 서상륜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초의 자생교회인 소래교회를 세웠을 뿐 아니라, 후에 우리나라 장로교 최초의 7인 목사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서병호는 2세가 되던 해 언더우드에게 세례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유아세례자가 되었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 사에서 이 가정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하겠다.

 

서병호는 8세가 되자 경신학교의 전신인 영신학교에서 공부하며 신학문을 접하면서 기독교 교육을 받았다. 얼마 후 고향으로 돌아가 한학을 공부하면서 성경공부를 계속하였고, 이미 12세에 노방전도를 감행하기도 하였다. 당시 기독교를 전도하는 일은 어린 서병호에게 용기가 필요한 것이었다.

 

 13살에는 조혼의 풍습에 따라 같은 고향 사람 김구례와 혼인하였다. 김구례는 광산김씨로 김성섬의 딸이다. 이 가문도 일찍 개화하여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소래교회를 세우는데 기여하였으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김성섬의 아들 김필순은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 7인 중 한명이었다. 105인 사건으로 중국으로 망명하여 병원을 세워 독립운동가들을 돕다가 1919년에 타계하였다. 딸 김구례, 김순애, 김필례 3인은 모두 정신여학교 출신이었고,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김순애는 새문안이 낳은 독립운동가 김규식의 부인이었다. 손녀 김마리아 역시 정신 여학교 출신이었고, 애국부인회를 이끌었던 독립운동가였다. 서병호와 김구례의 혼인은 결과적으로 신앙심과 애국심이 충만한 동지의 결합이었다.

 

 서병호는 결혼 후에도 학업을 계속하여 소학교를 마쳤고,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상경하여, 1905년에는 최초의 경신학교 졸업생이 되었다. 졸업 후 귀향하여 아버지가 설립한 해서제일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안창호가 설립한 평양 대성학교를 거쳐, 모교인 경신학교에서 교육활동에 힘썼다. 그는 단지 교육에만 힘쓴 것이 아니라 애국사상도 고취시켰다. 이 시기는 일제가 한일의정서, 을사늑약을 거쳐 우리의 국권을 빼앗은 때였다. 당시 기독교 학교의 저항에 부담을 느낀 일제는 교사들을 회유하려 하였는데, 서병호도 그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유혹에 넘어지지 않고 중국으로 망명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중국 망명과 신한청년단

30세가 되던 1914년 한국을 떠나 망명길에 오른 서병호는 남경에 도착하여 공부에 뜻을 두어 금릉대학(金陵大學)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금릉대학은 기독교 대학으로 당시 한국 학생이 15명 정도 재학하였고, 주일에 대학에 모여 한국어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였다. 그는 1914년에서 1918년까지 학문에 힘쓰는 한편 당시 상해와 남경 일대로 망명한 독립지사들과 긴밀한 접촉을 가지면서 독립운동을 병행하였다. 특히 기독교인들과 유대를 공고히 하면서 국권을 찾는데 뜻을 두었다.

 

 1918년 1차 대전이 끝나고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였다. 당시 일제 식민통치 하에서 신음하던 한민족은 망명활동이나 비밀결사에 의지하거나 교육활동이나 종교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 한국인은 위력(威力)의 시대가 가고 도의(道義)의 시대가 온 것으로 믿고 한국도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어 강력히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마침 윌슨의 특사로 요동에 파견된 크레인(Charles Crane)이 금릉대학에 와 파리 강화회의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었는데, 이를 듣고 서병호는 독립을 위한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였다. 이에 학업을 중단하고 상해로 가 동지를 규합하여 新韓靑年團(신한청년당)을 조직하였다.

 

 신한청년당은 1919년 2월 국외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독립운동 단체였다. 서병호와 여운형이 중심이 되었는데, 여운형 역시 기독교인이며 금릉대학 영문과에서 공부하였다. 당시 참여했던 사람들은 김규식, 김철, 선우혁 등 회원이 150여명에 이르렀다. 신한청년단은 『신한청년보』를 발행하여 교포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 외교활동에 주력하였다.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김규식을 파리강화 회의에 파견하였고, 장덕수를 일본에, 여운형을 노령(러시아)에 파견하였으며, 서병호 자신은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지휘하였다. 그는 파리 강화회의의 중요성을 알리고 대표 파견의 경비 조달을 위해 중국인으로 가장하여 국내에 잠입하였다. 당시 국내는 고종 황제의 因山(인산:國葬)으로 국내 분위기가 뒤숭숭하였다. 부산에 도착했던 서병호는 마침 재일 유학생 대표로 귀국하는 처조카 김마리아와 함께 서울로 와서 3.1운동의 민족대표인 이갑성(李甲成), 이승훈 등을 만났다. 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여 내외 정보를 수집하였고 민족대표에게 파리 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였음을 알렸고 자금조달을 의뢰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후 3월 13일 일제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압록강을 건너 상해로 되돌아갔다. 3.1운동 후 각처에 흩어져 있던 독립지사들이 모여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는데, 서병호는 의정원 위원과 내무위원으로 선임되어 독립운동에 주요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상해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한국적십자사를 창설하였고, 상해, 남경, 국내, 미주 하와이 등에서 자금을 모아 간도지방의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 독립운동과 더불어 교육활동도 계속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귀국하였다. 이때 서병호는 자신의 귀국을 늦추고, 교포들의 귀국에 필요한 수속과 편의를 마련하여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배편으로 1947년 8월 귀국하여 30여년 망명생활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미 60세가 넘어 조국에 정착하였다.

 

 서병호는 귀국한 후 정치하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새문안교회의 장로, 경신학교 교장, 맹인협회와 농아협회 이사장 등의 직함을 가지고 교회와 교육, 그리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도 그에게는 애국의 다른 표현이었다. 그의 묘비 “내가 있기 위해서는 나라가 있어야 하고 나라가 있기 위해서는 내가 있어야 하니 나라와 나와의 관계를 절실히 깨닫는 국민이 되자”는 글귀를 통해 그의 애국관을 짐작할 수 있다. [e-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