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for Japan, Japan for the world, The world for Christ and all for God

(나는 일본을 위하여, 일본은 세계를 위하여, 세계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우치무라 간조가 그의 묘비명으로 스스로 적은 글이다.

 

 

 우치무라 간조(1861~1930)는 삿뽀로농업대학 시절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예쁜 여자들이 노래를 부르는” 외국인 구역에 가서 구경을 하자는 친구의 제안으로 처음 기독교 예배에 참석했었던 우치무라는 5년 후 삿뽀로농업대학에 진학했다. 당시 삿뽀로농업대학은 미국 메사추세츠주립 농과대학의 학장인 W.S.클라크 박사에 의해 기독교 복음이 전파된 상태였다. 그의 신앙은 학교의 동료들과 함께 신학과 신앙서적들을 읽으며 토론하거나 신실한 기도 모임을 가지면서 점차 깊어졌다. 학교를 졸업한 그 다음해 우치무라는 동료들과 함께 1882년 삿뽀로 독립교회를 세웠다.

 

 우치무라에게 큰 영향을 준 사건이 삿뽀로독립교회의 결성과 활동이었다면,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뉴잉글랜드의 애머스트 대학 총장 실리 교수와의 만남이었다. 1884년 삿뽀로독립교회를 떠난 그는 많은 서적을 통해 만났던 실리 교수를 찾아가 공부를 시작했다. 그와의 인격적인 만남, 그리고 서구의 기독교를 직접 체험하게 되면서 참된 기독교의 신앙관을 확립했다. 에머스트 대학교를 거쳐 하드포드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그는 1888년 일본으로 귀국하였고, 그는 신앙의 훈련을 위해 나가다의 기타고시시학관에서 후진을 양성하다가 도쿄의 제일고등중학교 교원으로 부임했다.

 

 1891년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바로 ‘우치무라 간조 불경사건’이다. 천황이 서명한 교육칙어를 천황의 초상화 옆에 걸어놓고 그 앞에 경의를 표하는 의식이 거행되는데, 우치무라는 60여명의 비기독교 교사들과 천명이 넘는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앙 양심에 따라 그 자리에 선 채 혼자 절을 하지 않았던 사건이다. 그는 전국적으로 반역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고, 이때부터 기독교가 탄압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직장과 아내를 잃은 그는 각 지역을 돌면서 <구안록> <나는 왜 기독교인이 되었는가> <기독교 신도의 위한> 등의 저술에 몰두했으며, ‘성서연구회’ 활동과 월간지 <성서지연구>를 간행하였다. 그가 주관했던 ‘성서연구회’는 당시 도쿄 고등사범학교에 다니던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많은 한국인 제자들을 길러내었다. 그 제자들 중 한명인 김교신은 귀국하여 <성서조선>의 주필을 맡아 활동했고, 4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서 주었던 이수정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우찌무라 간조. 그는 전 생애를 통해 일본적 기독교를 위해 고민했으며 ‘일본의 독립과 자유가 귀한 만큼 조선의 독립과 자유도 귀하다’고 강조했던 지한파이기도 했다. [e-새]

 

 

(글 : 심정남 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