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은퇴하시면서 원성희 권사님과 ‘둘이 하는 음악회(Joint Recital)'를 열어주셨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5년이나 훌쩍 흘렀습니다. 여전히 건강하신 모습 참 감사합니다. 먼저 장로님 가족 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저는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났습니다. 3대째 기독교가정이지만 전체적으로는 5대째 기독교 가정이기도 합니다. 조부, 부친, 본인, 아들, 손자의 순으로 귀한 믿음이 이어지고 있으니까요. 부친이신 고 안광국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까지 역임하셨습니다. 여러 대에 걸쳐서 독자로만 이어져왔기에 조부이신 고 안기수 장로님은 늘 우리 집안의 식탁에 숟가락과 젓가락이 네 벌만 되어도 좋겠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조부께서 하나님을 믿게 된 후부터 자손이 불어나 지금은 그분의 자손이 무려 200명에 가깝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부님을 우리 가정의 아브라함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버님은 신사참배 등의 어려움이 있던 시절에 어떻게 목회를 하게 되셨나요? 부친께서는 청주에 있는 선교사 집에서 도우미로 지내던 중, 선교사의 도움으로 평양 숭실중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일제시대에는 신사참배 등의 어려움이 있어 중국으로 망명하여 목회를 하시고, 저 또한 초등학교를 중국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해방 직후에도 고국으로 돌아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후에 군수, 도청의 후생과장을 거쳐, 결국에는 신광교회 초대목사로 부임하게 되고, 대전 고등성경학교의 책임자를 지내기도 하셨습니다. 저는 형제들 가운데 장남이고, 미국에 사는 안재신, 별세한 고 안재영 집사, 권사회에 속해 있는 안재옥 권사가 동생들입니다.
1963년에 새문안교회에 처음 나오셨다고 들었는데 무슨 동기가 있으셨나요? 새문안교회에 오게 된 동기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당시 담임목사이시던 강신명 목사님이 부친이신 안광국 목사님과 평양 숭실전문학교와 평양신학교 동창 관계였던 점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둘째는 연세대학교를 졸업하면서 졸업예배를 새문안교회에서 드린 이후, 새문안교회가 신앙노선이 바르고 앞서가는 교회라는 느낌을 받게 되어, 그 후 몇 교회를 오가다가 새문안교회를 택했습니다. 셋째는 언더우드가 세운 대학을 나왔으니 언더우드가 세운 교회에 가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언더우드가 세운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언더우드가 세운 새문안교회의 교인이 되었고, 언더우드가 세운 경신고등학교에서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지요. 또 한 가지는 원일한(H. G. Underwood의 손자) 장로님과 같이 당회원이 되고 부인이신 원성희(Dorothy Underwood) 권사님과는 교회음악을 특별히 좋아하는 관계로 2003년 은퇴하면서 음악회를 준비하게 된 것입니다. 은퇴 한 해를 앞두고 원권사님과 저는 나란히 새문안 음악원 원장과 이사장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중3 때 이미 어른 성가대에 입대하셨다고 들었는데 특별한 사연이 있나요? 저에게는 찬양의 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보람도 있고, 감개무량하기도 하고, 참으로 감사할 따름이었으니까요. 아직도 찬양하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죽기까지 찬양하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신광교회 시절, 중학교 3학년이 되는 해인 어느 날. 어른 성가대 지휘자가 저에게 와서 “종호야! 다음 주일부터 성가대 대원이 되어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뜻밖의 일이었기에 저는 즉시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지휘자가 “어른이 말을 하면 예! 하고 순종 해야지. 잔소리 하지 말고 다음 주일부터 성가대에 들어오너라.”하고 불호령을 내리시는 바람에 중3 때 어른 성가대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를 계기로 지금까지 평생 찬양대원으로 봉사하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2004년까지 41년 간 찬양대원을 하실 정도로 워낙 찬양을 좋아하시니까 모든 찬송을 다 좋아하시겠지만, 특별히 좋아하시는 찬송이 있으신지요? 45년 오랜 세월동안 장로로 지내시면서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이었나요? ‘새로핌’찬양대 이름도 장로님의 생각이셨다고 들었습니다. 새문안교회에 와서 처음 독창으로 헌금송을 불렀던 새찬송가 288장(구 204)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와 새찬송가 295장(구 417) ‘큰 죄에 빠진 나를’ 을 특히 좋아합니다. 새문안교회를 섬기며 제일 많이 기억에 남는 일들도 당연히 찬양대와 관련된 일들입니다. ‘예본찬양대’의 전신인 당시 단일 찬양대였던 ‘새문안성가대’시절을 시작으로, 청년․대학생 중심의 ‘한기림찬양대’의 탄생과 ‘새로핌, 하나, 새온찬양대’의 탄생을 지켜보았으며, ‘예본찬양대’의 대장을 끝으로 은퇴를 맞이하였습니다. 찬양대 활동을 하던 때, 찬양대 이름을 순우리말로 짓기를 제안하여 직접 명명한 ‘새로핌’이라는 명칭이 투표를 거쳐 선택되기도 하였습니다. 둘째로 2001년도와 2002년도 해외선교부장 재임 시, 당회에서 한․태 메쑤어이 기독교 교육센터를 설립하기로 결정이 되어, 대지매입을 비롯해서 ‘새안교회’와 ‘평안의 집’을 설계하고 완공하는데 관련된 사역을 수행한 일도 기억에 남습니다.
새문안교회 교인으로서 자랑스럽다고 생각한 때와 그런 면에서 새문안교회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1966년 7월 17일 주일저녁 예배시간 ‘멕시코(Mexico)’에 선교사를 파송한 일이 새문안교인으로 언제나 감사하고 자랑스럽습니다. 1887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새문안교회를 세운 이후 79년만의 일이었습니다. 받던 교회가 이제 주는 교회로 성장변화한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창립 100주년을 맞아 1987년 6월 28일 교회가 조준형 목사님을 ‘태국’ 선교사로 파송한 일 또한 감사의 제목입니다. 둘째로 새문안교회의 특징은 장로교회다운 교회의 모형에 가깝다는 데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장로교회의 교리에서 나왔다는 말처럼 우리교회는 예배와 치리 모두에 걸쳐, 장로교회다운 면모를 지키면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찬양대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새문안교회 찬양대가 ‘서울에서 제일가는 찬양대’, ‘세계적인 찬양대’가 되기를 소망하라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이번 솔리스트(독창자) 선발 역시 이를 위한 하나의 기반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이분들을 주축으로 좀 더 전문적인 찬양대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찬양대 후배들은 ‘신앙중심의 찬양’ ‘마음속의 믿음을 바탕으로 한 찬양’을 이어나가길 바랍니다.
미래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젊은이들을 위해서도 격려의 말씀 부탁드립니다. 출애굽의 주인공 모세가 위대했던 것은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출애굽의 주인공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택해주셨고,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도록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는 무조건 순종하는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같은 지도자도 사용하시지만 ‘나사로’와 같은 거지도 사용하여 믿음의 표본으로 삼으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모두 작은 아브라함이라는 생각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언젠가 반드시 우리 모두를 귀하게 쓰실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래서 힘들 때마다 큰 위로가 되는 성경말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는 귀한 말씀이 담겨있는 요한복음 14장을 참 좋아합니다.
아내인 유민자 권사와는 원남동교회 찬양대에서 만났고 결혼하기까지는 어른들의 반대로 인해 많은 어려움도 겪었지만, 이젠 다 지나간 소중한 추억이고, 두 분은 2남 1녀를 두었다. 내과의사로 귀하게 쓰임 받고 있는 안강현 집사와 인제대에 재직 중인 안덕현 교수, 사랑하는 딸 안지현 집사가 각각 속한 일터에서 또 교회에서 열심을 다해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다. [e-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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