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문턱에 들어섰는데도 바람이 아직 쌀쌀하던 지난 3월 15일 주일 11시 홍보출판부 편집실에서 송순옥 공로권사를 만났다. <원로와의 대화>에서는 믿음선배들의 긴 세월을 통한 신앙생활의 지혜를 교우들과 지면으로 나누고 있다. (편집자 주)

 

 

 

 평생을 의료인으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으시는 모습에 무척 감동해 왔습니다. 올해도 태국으로 의료봉사를 가신다고 들었는데, 언제부터 의료선교에 참여하셨는지요?

광복 직후 1946년, 그러니까, 의과대학 예과 시절부터 부터 의료선교 봉사를 했습니다. 당시 세브란스 의대 생리학 교수이시던 이병희 장로님을 팀장으로 하고 저를 비롯하여 송요섭, 김금선 등 의과대학생들을 주축으로 해서 빈곤층과 농촌 등지에 가서 무료 진료를 했습니다. 그 후부터 의료선교 사역이 지속되어 오늘의 교회 독립부서인 의료선교부로까지 발전된 겁니다. 1992년부터는 단기 해외 의료선교를 연 1회 하다가 몇 해 전부터는 연 2회로 늘렸고, 국내에서도 월 2회 외국인 근로자들과 교인을 상대로 무료 진료 와 상담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새문안교회 의료선교뿐만 아니라 한국 의료선교 협의회의 해외의료선교 확장에도 많은 노력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1976년 대한 기독교 여자의사회 회장, 한국 의료선교 협의회 이사, 기독교교회 협의회(KNCC) 의료선교 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바삐 지내던 때, 방글라데시 의료선교단이 처음으로 조직되었습니다. KNCC 의료선교위원회에서 계획하고 준비하고 한국 의료선교 협의회 후원으로 1977년 1월 초에 목사 2인, 기독교 사회사업가 1인, 의사 6인 도합 9인이 1개월간 다녀왔지요. 당시 강신명 담임목사님이 계시던 새문안교회도 후원금으로 지원해 주셔서 다녀온 후 보고회도 했습니다. 바로 그 방글라데시 의료선교가 시작이 되어 오늘의 한국 의료선교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새문안교회에 가족이 다 나오고 계시죠? 우리 교회는 언제부터 나오셨나요?

1943년부터 어머니(박화덕 권사)와 동생(송경옥 집사)과 함께 나온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버지(송은수 집사)께서는 차재명 목사님 시무하실 때부터 이미 나오셔서 찬양대원이셨습니다. 할아버지(송윤묵 영수)께서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장로 피택 후에 1934년경 서울 마포로 이주하시게 되어 도화동교회(현 마포교회)에 출석하시어 영수로 강단을 지켜 섬기셨습니다. 그래서 온 식구가 도화동 교회에 출석하였지요. 저는 1936년 초에 장대현교회 유치원을 졸업하고 미국 여자선교사가 교장이시던 정진여학교(초등학교)에 진학해 다니다가 곧 조부모님을 뒤따라서 부모와 동생과 함께 상경해, 도화동교회 예배에 참석하다가 1943년 우리 네 식구가 서대문 쪽으로 분가를 하면서 아버지만 먼저 다니시던 새문안교회에 모두 출석하게 되었지요.

 

그야말로 한국 초대교회 가정에서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셨는데, 권사님이 성장하시던 시기엔 여성으로 의대 진학이 흔하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굳이 의대를 가시게 된 사연이 있나요?

할아버지께서 의학공부하기를 강권하셨습니다. 1946년부터 의과대학이 의예과 2년과 본과 4년, 6년 과정으로 처음 시작되어서 첫 의예과생으로 공부했는데 1952년에 의학사로 서울여자의과대학(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해 7월에 제1회 대한민국 의사 국가시험에 합격해 의사면허를 취득했습니다.

 

그렇다면 한참 공부하시던 때에 6.25가 발발한 셈이네요? 어떻게 그 어려운 시기를 넘기셨나요?

우리 가족들은 서울에 남아 있었습니다. 1950년 당시는, 제가 다른 학과에 진학했더라면 6.25가 나기 전 그 봄에 이미 대학을 졸업 했었을 터인데 의학과는 6년 과정이기에 학부 3학년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학병원에 동원되어 전쟁부상자들을 돌보다가 9.28 수복직전에 인민군들이 후퇴하면서 우리들을 강제로 끌고 가려고 했는데 때마침 약리학 교수님의 귀띔으로 병원을 탈출하여 변을 면했습니다. 집이 서대문 쪽이라 6.25직후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난 좌익 엘리트들의 서슬이 퍼런 모습을 목도하며 두려워 거의 숨어 지냈지요.

 

새문안교회 내에서 봉사도 지속적으로 하셨죠?

젊은 시절에는 찬양대원, 청년회원, 주일학교 교사 등으로, 중년기 이후로는 대학ㆍ청년부 지도자로, 성경공부 선생 등으로 섬겼습니다. 김동익 목사님 재직 당시엔 목사님께서 대학ㆍ청년부 성경공부반을 창설하시고 선생으로 불러 주셔서, 평신도로는 유일하게 부목사님들과 함께 잠언 등 성경공부반을 섬겼습니다. 그 때 타교회의 청년들도 소문을 듣고 와서 저와 함께 성경공부를 한 일도 생각납니다. 여전도회 회원으로, 권사회 회원으로, 제직회 회원으로 등등 요직도 많이 맡아 섬겼지요. 2여전도회 회장 당시 1983년 성탄 예배를 마치고 자원하는 회원들과 함께 시립서대문병원에 입원해 있는 결핵환자들과, 그 근처 산등성이에 움막 생활을 하고 있는 음ㆍ만성 결핵 환자들에게 돼지고기를 싸들고 가가호호 심방하며 성탄메시지와 주님의 사랑을 전했던 일은 아직까지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서울 YWCA 회장도 역임하시고 그 활동도 열심히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1967년부터 자원지도자로 활동을 시작해서 그동안 여러 위원회 위원장, 회장, 부회장을 역임했고, 요즘은 역대 이사모임과 명예위원회 위원으로 정기적 월례회에 참석하고 있어요. 특히 감사한 한 가지는 1970년에 YWCA 청년부에 성경공부하는 ‘빈들클럽’을 창설하고 함께 말씀공부를 하며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던 일입니다. 그 때 함께 은혜 받은 젊은 친구들이 신학공부를 해서 목사가 되고 전도사가 되고, 목사 사모, 교회 안수집사, 권사가 되어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복음 역사에 쓰임 받고 있어 더욱 감사와 찬송을 드릴 뿐입니다. 1979년 11월 5일에 세상을 떠나 앞서 간 남편, 박두영장로를 기억하며 함께 성경공부하는 ‘모두회’로 이어져 연륜을 더해가며 신앙의 성숙을 기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모여 성경공부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후배 여성도들에게 해주고 싶으신 말씀과 혹 즐겨 부르시는 찬양이 있으시면 나누어주십시오.

여성도들은 올바른 역사의식과 주체성을 갖춘 사명인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섬기고 나누며, 사랑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늘 기도하며, 성경보고 찬송 드리기를 더욱 즐거워 하셨으면 합니다. 성경말씀 구절구절을 모두 다 귀합니다만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7,18절 말씀으로 힘을 얻습니다. 밤이 새도록 성경봉독을 계속하고, 찬송가는 1장부터 마지막장까지 온 종일을 목이 피곤한 줄도 모르고 부르고 또 부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젊은 날부터 계속되어 왔습니다. 요즘은 찬송가는 한 옥타브를 내려서 부릅니다. 노년에 이르렀으니 목소리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찬송가는 23장 ‘만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와 420장 ‘너 성결키 위해 늘 기도하며’를 잘 부릅니다. 항상 말씀을 묵상하고 되 뇌이며, 찬송을 부르면서 넘치도록 부어주신 은혜의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행복하게 지내고 있지요.

 

 

63년은 짧지 않은 시간이다. 17세때부터 고희(古稀)를 보낸지도 10년 가까이 된 오늘까지 이 길고 긴 세월동안 의료와 의료선교에 한결같이 힘쓰고 있는 송권사를 바라보니 눈이 부시다. 고(故)박두영 장로와의 사이에 3남매, 박혜주 집사(새나리찬양대), 박혜성 집사(예본찬양대), 박수철집사(새빛안과 병원장)를 둔 송권사는 손자손녀 6명도 모두 우리 교회에 나오고 있어 송권사는 행복하다. 그것만으로도 참 감사하고 행복하다. 그런데 어느 교회보다 앞선 새문안교회 의료선교부 활동에 참여할 수 있어 더 더욱 감사하다는 송순옥 권사. 요즘, 그는 또 떠나기 위해 기도하고 있다. 오는 5월 1일부터 6일까지 실시되는 새문안교회 해외 단기의료선교를 준비하며 기도하는 중이다. 이번엔 김장원 선교사 사역하고 있는 태국 치앙라이에서 50명 정도의 단원들과 동역한다. 성경공부와 기도에 힘쓰며 기독교 문예창작반에도 나가 글쓰기 공부도 하는 송권사의 지침이 없는 활력도 눈부시다. 소망하시는 대로 주님 안에서, 섬기며, 나누며, 배우며, 묵상하고 기도하며, 찬양하면서 은혜와 사랑 가운데 평안을 누리시길 기도한다. [e-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