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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장신대학교(경기도 광주 소재)는 4월 16일 개교 55주년과 강신명원로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행사로 전기출판과 기념우표를 발간하고 <강신명 홀>봉헌과 현판식을 거행했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小竹 강신명 목사》전기는 서울장신대학교 한국교회사 김명구 교수에 의해 서울장신대학교 출판부에서 발간되었다. “한알의 밀알” 과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믿음”을 강조하시며 겸손히 <작은 대나무>이기를 주장하시던 성품 그대로 소개된 책 서두에 문성모 총장의 ‘한국교회 인물 바로 세우기’ 의 일환으로 쓰게된 전기 내용은 거의 1900년대 1세기를 살아온 생애와 교회사의 한 장르이다. 강신명 목사는 새문안교회 당회장으로 24년간 시무하여 에큐메니칼 운동에 선도자로서 새문안 교회 현재의 기틀을 다졌고 1980년 1월 새문안 교회에선 처음으로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교회분파로 총회의 제의에 따라 장로회 신학대 2부(야간 신학교)를 세워 한국장로교의 위치를 회복하겠다는 이념하나로 교수들은 거의 무보수로 시작했으나 학교는 부채만 가득 안고 있었다. 1962년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강목사는 교장이 되어 학교를 떠 맡아 학교의 이름을 서울 장로회 신학교로 바꾸고 새문안 교회 교육관을 빌려 1969년에서 1979년까지 임시 교사로 사용하여 외부에선 ‘새문안 신학교’ 로 불리기도 했다. 사연을 모르는 사람들은 목사님 단독으로 학교를 세운 것이라며 데려온 자식 감싸듯 수근거림과 눈총도 받았다. 시간과 경제에 쫓기는 초라한 신학인을 위해 2부(야간)교육은 숭인동 교사로 옮기고 학과도 개설되고 평신도와 소명을 가진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가 제공 되었다. 쟁쟁한 신학교수(목사)와 교회음악 대가들을 강사로 소명이 보이는 어려운 지망생에게는 선뜻 사비로 등록금을 지원하기도 하고 지금의 교회음악원 처럼 새문안 교회 교인 중 졸업생도 많다. 현재 서울 장신대학교로 정식인가를 받으며 경기도 광주로 이전되기까지 거의 사제를 털어 온 힘을 기울였다. 이번 창립기념예배에는 이수영목사가 “착하고 충성된 종의 삶”이라는 설교를 하였고 2부에는 곽선희 명예이사장이 강목사님과 썰렁한 현재의 캠퍼스를 마련해 시작하던 때를 회고 하였다. 시간을 쪼개어 활동하신 이력서는 항상 A4용지 두장 가득 채워 타자될 정도로 활동이 많은데, 이번 순서지 한면가득 소개된 1909-1985년까지 1909년 6월 13일 경북 영주군 평은면 천본리 내매동리의 출생에서 중학교를 네 번 옮기고 평양 숭실전문까지 그 시대 어려운 현실을 나타낸다. 전기소개에서 저자는 자신의 가족 이야기처럼 자세하다. 고향인 경북 영주와 이곳저곳 목사님 발자취를 밟아, 항상 힘주어 자랑하시던 내매동리, 냉면을 좋아하셔서 사람들이 고향을 평양으로 착각하던, 평양길이 열려있으면 그곳까지 갔을텐데 노고가 많았다. 가보아도 흔적은 없겠으나 제한된 시간에 쫓겨 다 못쓴 전기가 아쉬운 표정이다. 사모님과 사랑하는 큰 딸과 큰 아들은 하늘나라에 동행하였고 가족을 대표한 감사의 인사에서 4남, 막내아들 강석공 목사는 “감사합니다. 전기라고 해서 다 잘한 일만 쓸 수는 없지요. 사람이라 잘못한 일도 있을터인데 후손들에게 귀감이 될 귀한 선물을 남겨 주셔서 정말 수고하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며 뒤를 잊지 못한다. 새문안 교회 후원도 동참된 <강신명 홀>로 봉헌 현판된 신축 교사에는<기념 사료관>이 있어 아직은 많이 모이지 않은 유품이나, 걸려있는 신학박사 까운을 보니 생전에 입으신 모습이 떠오른다. 곳곳에 필체와 성적표등 흔적을 느낄 수 있어 부활이 느껴진다. 사료관에 전시된 우수한 성적표, 숭실전문 영문과도 우등졸업하여 다른 회사에 추천되어 갔는데 후에 아버지의 호통으로 평양신학교로 입학했고 어릴때 부흥사 김익두목사가 석양길에 조랑말 타고 논둑길 가는 뒤를 따르며 왠지 나도 이길을 가야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며 아마 다시 시작해도 그 길을 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저자는 하나님의 뜻인지 경상도에서 평양까지 올라가 개신교 각교파를 초월하여 하나로 일치하듯 펼친 폭넓은 목회의 안목과 영락교회에서 동사목사로 시무한 한경직 목사를 숭실 7년 선배로서, 학계 교계 선배로서 존경하며 받들어 온 예의 깊은 인간애를 강조한다. 탁월한 기억력으로 영락교회 일로 한경직 목사가 가끔 교인의 일과 교계 일을 의논하셨던 때를 기억한다.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피얼스 박사의 연합예배 통역과 교계 외국인의 통역은 언제나 두분의 차지다. 어르신께 각별한 예로 대했던 목사님은 신학교때 후원해 주신 분들과 조금이나마 은혜를 받은 분들을 결코 잊지 않으시며 가끔 말씀하신다. 예전엔 담임목사가 일일히 심방을 하니 목사님 보다는 자상한 할아버지, 아버지, 상담자가 되어 교인들의 일거수일투족 족보까지를 통찰하게 되었다. 커피를 정말 좋아하시냐고 물으니 “그 어려운 시절 귀한 것이라고 집집마다 내놓는 걸 거절할 수 없어 먹었더니 그리 소문이 나더라”고 웃으신다. 가끔 동요 300곡집 이야기와 작곡한 노래들을 들려 주신며 뛰어난 가창력으로 예배 찬송 때 화음을 맞춘다. 우연히 본 옛날 등사인쇄가 되어있는 칸타타 비슷한 작곡의 악보등 작곡자가 "소죽"으로 표시되어 아마도 숭실 음악 전도단의 길잡이가 되었을 것으로, 김동진등 음악가들 처럼 목회를 하지 않았다면 목사님도 작곡을 계속 했을 것이라도 하신다. 교계에서 “살아있는 교회사”로 불리시던 목사님은 별세전 교회사를 쓸 계획이었다. 교회사를 쓰셨다면 한국교계에도 귀한 자료가 되었을텐데, 별세후 동생 故 강신정(기장 양평장로교회)목사도 전기를 쓰려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새문안 교회와 숭실대는 이사와 교수진이 계속 연관이 되어 있고 목사님은 이사장이 된지 40일만에 아무도 원치않던 총장직을 맡게되어 “내 모교만 아니면 나도 안 가고 싶다” 며 한숨 지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1982년 모교인 숭전(현 숭실)대학교 4대 총장으로 재직하시다 1985년 6월 22일 마지막 과업이 과중했는지 건강에 이상이 생겨 종합 검진의 결과에서 예상치 않던 간단한 치료가 부작용으로 갑자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 교회처럼 학교에서도 젊은이들 편에서 평양숭실의 맥으로 축구부를 재건, 영자신문사를 창설하고 교목실을 활성화 시키며 음악대의 맥으로 합창단과 국내 대학 유일한 만돌린오케스트라에도 지원을 높여 그 옛날 학생활동을 생각하시듯 진리와 봉사의 이념과 학생활동에 힘을 주었다. 낡은 바바리와 영국신사의 모자를 즐기시다가 총장이 되어 따님의 권유에 못이겨 아껴 두었던 선물 받은 옷 한 벌을 입으시고 “내가 이렇게 호사해도 되느냐?”며 겸연쩍어 하신다. 목사님은 생전에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가는 인생 하나님 외에 무엇을 더 높이랴!” 은혜 입어 감사하다는 사람들에게 “네게 감사할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리신다. 한글을 사랑하시어 한글날 표창 받으시고 좋아하시던 모습, 그래선지 설교에선 성경을 쉽게 자세하게 풀이하며 “내가 너무 말이 많고 좁쌀 영감이지?” 교인들 하나하나를 기억하고, 지금도 목사님과 추억을 갖고계신 어르신들은 친구처럼 반기시며 눈이 보이지 않도록 파안대소하시던 모습을 잊지 못하실 것이다. 좋은 체격에 두툼한 손으로 깨알같은 작은 글씨로 뒷면 여백인 광고지를 모아 설교요약을 정리하셨던 알뜰함, 손상된 지폐를 가지런히 하여 수선하시던 모습, 회상하면 할 말이 많다. 목사님은 생전에 설교집도 남기지 않으시고 기독교계 100주년, 새문안교회 100주년의 기쁨도 보지 못하였다. 사모님의 건강을 염려하시고 겉으로만 좋은 체격인 자신의 건강은 돌보실 시간이 없었다. 집안과 자신에게 다소 엄격하시며 대표로 활동하여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아랫사람에게 사소한 일을 덜어 주려 손수하시며 타인을 배려하시니 더 높이 세워 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가시기 전날까지 직무에 충실하셨고 마지막 생일, 작은 케잌도 나무라시며, 이런 글도 원치 않으실텐데 탄생 100주년 기념 전기를 보면 무어라 하실까? [e-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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