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우드 정신과 기독청년의 사명

  (1) 언더우드의 신앙과 선교정신은 준비된 신앙의 가문에서 탄생하였다. 영국에서 태어나 13세에 미국으로 이민한 언더우드는 외증조부가 유명한 목사였고 삼촌도 런던선교회 총무목사인 신앙의 전통 가문에서 자랐다. 인쇄물품상이자 발명가인 언더우드의 부친은 고아원 설립운동가 조지 뮐러의 후원자로 자선사업과 교회 기부에 열심이었고 철저한 경건생활 속에 자녀교육을 했다. 언더우드의 형도 언더우드의 조선 선교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언더우드가 새문안교회에서 첫 사업으로 고아원학교를 설립함도 부친과 뮐러의 영향이 컸다. 언더우드 가문의 가훈은 “불가능을 일소에 부치고 무엇이든 반드시 될 수 있다고 말하라”였으니 언더우드의 헌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는 4세에 인도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선교사가 되고자 했고 미국 이민 후 뉴브론즈윅 신학교에 다니면서 인도 선교를 준비하다가 조선의 상황을 듣고 25세 되던 해 “조선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여건 좋은 인도 선교 대신 악조건의 조선을 택해 왔으니 그 결단은 선교신앙의 가문에서부터 준비된 결과이었다. 우리들 가정도 이런 가문으로 준비되고 있는가?

  (2) 언더우드 선교는 미국의 학생자원선교운동의 결실이었다. 세계선교사는 기독청년들이 새로 쓰는 현대판 사도행전이다. 1806년 윌리엄스대학의 밀즈(Samuel J. Mills)는 날마다 모여 대학 부흥을 기도했는데 어느 날 폭우가 쏟아져 건초더미 속에서 뜨겁게 기도를 하다 선교를 서원하면서 ‘건초더미 기도운동’(The Haystack Prayer Movement)을 일으킨다. 이어 YMCA 운동, 무디의 헬몬산 집회의 선교운동 등이 미국에 학생선교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을 일으키니 언더우드는 이런 학생선교운동의 결실이었다. 우리는 기독청년들의 내실 있는 선교를 위해 얼마나 뜨겁게 기도하고 있는가?

  (3) 언더우드는 복음적 선교 원칙에 입각해 다양한 선교 운동을 실천하였다. 그는 새문안교회 등 여러 교회를 세우면서 중국 선교사 네비어스(Nevius)가 주장한 자립(自立), 자치(自治), 자전(自傳)의 삼자(三自) 선교원칙에 따라 조선인에 의한 교회자립을 철저히 실천해 한국 교회가 빠른 속도로 자립하고 세계선교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고아원, 경신학교, 연세대 설립으로 교육 구제사업을 했고, 종합일간지 성격의 ‘그리스도신문’ 발간으로 신학문전파, 기독언론 육성, 사회소통의 선교를 했으며, 한국어문법, 문화 연구 등의 다양한 문화선교를 하였다. 국어학자 최현배도 이런 분위기에서 배출된 새문안 교인이었다. 우리는 주께 내 달란트가 선교의 도구로 쓰이기를 간구하고 있는가?

  이처럼 언더우드의 선교 생애는 가문의 경건신앙에서 잉태되었으며, 그가 교육 구제를 시작으로 다양한 문화선교를 실천한 방식은 오늘날도 해외선교의 모형으로 세울 만하다.   

 

 

복음 전파와 한국기독청년운동의 역사

  미국 개신교와 선교사들에 의한 복음의 첫 열매는 미래 한국의 지도자들을 배출한 것이니 서재필, 이승만, 김구, 안창호가 대표적이다.

  송재(松齋) 서재필(徐載弼, 1864-1951) 박사는 전남 보성 출신으로 20세에 갑신정변(1884)에 참여한 개화당이었다. 그러나 쿠데타가 삼일천하로 끝나자 부모형제, 처자는 자결, 처형으로 멸문지화를 당하고 언더우드가 들어오던 4월에 미국으로 탈출한다. 고학 끝에 복음을 만나 거듭나고 28세에 의학박사가 되자 갑오개혁으로 집권한 박영효의 요청으로 30세에 귀국을 결심한다. 그는 김옥균의 위로부터의 개혁이 실패한 것을 거울삼아 아래로부터의 개혁으로 신문을 통한 민중계몽을 선택해 순한글 ‘독립신문’을 창간해 백성을 일깨웠다. 독립협회를 조직, 독립문을 세워 자주자립을 계몽했고 배재학당에서 이승만, 주시경 등을 가르쳤다. 주시경이 국어운동에 헌신함도 독립신문에서 교정을 보며 한글의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서재필은 배재학당의 학생회인 협성회(協成會)를 만들어 서구토론문화를 전수했다. 협성회 토론에서 쓰던 구두표결방식으로 <‘가(可)하면 예 하시오, 부(否)하면 아니요 하시오>라고 함은 현대에도 쓰이고 있다. 협성회 토론훈련을 받은 이승만은 1898년 3월-12월까지 열린 만민공동회 시위를 주도하니 이 운동은 한국기독학생운동의 효시였다. 만민공동회는 종로에서 1만 명이 운집하여 수십 일간 장작불을 피우며 철야농성하고 신분을 초월해 누구나 연설하며 내정개혁을 요구했다. 그 후 서재필은 모함에 시달리다 민권운동의 씨앗을 심고 미국으로 돌아가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생 헌신한다.

서재필이 미국서 거듭난 것과 달리 국내에서 선교사에 의해 거듭나 기독학생운동을 일으킨 대표적 인물은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1875-1965) 대통령이다. 그는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한학을 익히고 배재학당에서 신학문과 영어를 익혀 조선에서 영어를 제일 잘하였다. 만민공동회 직후 고종 폐위 역모죄로 체포되어 24세 나이에 사형수가 되었으나 아펜젤러 등 선교사들의 옥바라지에 감화되어 기독청년으로 거듭나며 옥중학교를 만들어 한글과 성경공부를 지도하여 감옥소를 변화시켰으니 바울의 사도행전을 이승만이 재현했다. 옥중에서도 ‘제국신문’, ‘신학월보’에 수시로 논설을 실어 명논설집 ‘독립정신’을 탈고한다. 선교사들의 탄원으로 6년 만인 1904년 8월에 특사로 풀려난다. 그 후 29세 나이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야욕을 폭로하러 고종의 밀사 자격으로 미국으로 간다. 그러나 대세가 일본편으로 기울어져 별 효과를 못 얻자 신학문을 익혀 조지워싱턴대 학사, 하버드대 석사, 프린스턴대 박사를 6년 만에 마치니 천재적 두뇌 소유자였기에 가능했다. 그는 조선의 미래를 기독민주국가 건설에 두고 망국의 해(1910) 10월에 귀국, YMCA 총무로 활동하며 전국순례전도를 한다. 그러나 105인 사건으로 위태해져 다시 미국으로 탈출해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3.1 운동 후 상해 임정이 수립되자 상해로 와서 초대 대통령으로 활동한다. 다시 하와이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다 해방 후 단신으로 귀국한다. 좌우혼란 속에서 유엔을 움직여 유엔감시하 남북한 동시총선거를 추진하지만 소련의 반대로 남쪽만의 대한민국 건국을 이룬다. 유라시아 대륙 끝자락에서 유일하게 한국만 공산화가 안 된 것은 이승만이 기독교 정신의 자유민주국가로 대한민국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6.25 전쟁에서는 나라를 지키고 한미동맹을 맺어 한국의 발전 토대를 놓았다.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로 4.19 혁명을 맞아 하야하는 과오를 남겼지만 그는 과오를 인정, 즉시 하야하고 치료차 하와이로 출국한 5년 후(1965) 7월 19일 90세로 서거한다. 하와이 미 정부는 이날을 공휴일로 선포했으며 건국 대통령의 유해가 김포공항에 도착후 장례식은 공식적인 가족장이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국장처럼 예우했으니 전국에서 수백만의 인파가 모여 애도하던 장례식은 건국의 어버이에게 보내는 민심 그대로였다.  

  개화기 기독청년으로 기억할 또다른 분은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1949) 선생이다.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19세에 동학군으로 활동하고 의병운동이 일어나자 일본 장교를 죽인 죄로 감옥에 갇히나 탈옥, 도피하다 기독교에 입문하고 민중계몽활동을 시작한다. 옥중의 백범을 보고 모친이 “나는 네가 경기 감사를 한 것보다 더 낫다”고 아들의 옥살이를 격려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백정(白丁) 범부(凡夫)라도 애국심을 가져야 조선이 자주독립한다’는 소원으로 ‘백범’이란 호를 갖는다. 3.1운동 후 중국 망명을 결행하여 해방 후 귀국 때까지 중국에서 27년간 독립운동을 이끈다. 그는 임시정부에서 벌어진 좌파의 모략을 이겨내면서 임정을 지켜온 공로가 크다. 귀국 후에도 경교장에서 매일 새벽예배를 드렸으며 해방공간의 좌경화 풍조 속에서 이승만과 함께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한 김구는 총선거 문제로 이승만과 갈라져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을 모색하러 북행하지만 뜻을 못 펴고 돌아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다 흉탄에 서거한다. 비록 그가 대한민국 건국에는 직접 기여하지 못했으나 그의 나라사랑과 기독정신은 길이 기억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새문안이 낳은 기독청년으로 평남 강서 출신의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8) 선생이 계시다. 그는 청일전쟁으로 서울로 피란 왔다가 새문안에서 16세에 세례를 받고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활동을 하다 22세에 도미 유학, 29세에 귀국하여 민중계몽운동에 나선다. 망국 후 다시 미국에 가 흥사단을 창립, 미국과 상해를 오가며 임정활동을 하다 윤봉길 의거사건(1932)으로 체포 국내 압송되어 4년간 옥살이를 하다 풀려났다 재수감되어 투병중 서거한다. 그는 부강한 나라가 되려면 인재양성, 실력육성을 중시하여 ‘개인이 제 민족을 위해서 일함으로 인류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의무를 수행한다, 나라가 없고서 한 집과 한 몸이 있을 수 없으며, 민족이 천대받을 때에 혼자만이 영광을 누릴 수 없다’라고 하여 기독 신앙에 근거한 애국사상을 고취하였다.

 

  한국 기독교청년운동은 위와 같이 서재필, 이승만, 김구, 안창호 등 개화기 기독청년들의 구국신앙운동에 기초하여 시작되었다. 1900년대에 1만 명이던 기독교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00만 구령운동으로 크게 부흥하는데 부흥의 중심은 청년학생이었다. 새문안교회 1907-14년 교우문답 기록에 보면 문답자 313명 중에 학생이 102명으로 전체 1/3이었다. 기독청년들이 항일운동의 중심에 서자 일제는 기독교 탄압에 나서 총독암살미수사건이 있었다고 조작하고 기독교인 700여명을 체포, 105인을 유죄 판결하는 105인 사건을 일으킨다. 러시아 비밀경찰을 본 떠 만든 일제헌병은 70여 가지 각종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유도하였으나 선교사들과 미국 등 해외언론의 폭로로 2심서 대부분 무죄 석방되었다. 일제하에서는 3.1 운동이나 농촌계몽, 문맹퇴치운동 등 각종 사회운동을 기독청년들이 주도했다. 해방 후에는 좌우익 갈등 속에 기독청년들이 반탁, 반공운동에 나섰으며, 6.25 전쟁에서는 군인으로 호국하고 무너진 교회 재건에 발 벗고 나섰으나 많은 젊은이들이 전란 속에 죽는 수난의 시대를 겪었다.

  1950, 60년대에는 사회참여 문제로 교회가 분열하면서 기독학생운동도 변한다. 1970년대 기독학생운동은 노동, 민주화 운동으로 변하는데 1969년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의 창립과 1970년 11월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은 학생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고 1974년 민청학련사건은 주도자가 기독학생들이었다. 새문안 대학생회는 전태일 추모 금식기도회, 1979년 YH노동자사건의 구속자 석방기도회를 열며 기독학생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1980년대에는 인권, 통일 운동으로 전개되는데 학생운동에 김일성 추종의 주체사상파(주사파)가 개입하면서 좌경폭력화 경향이 나타나 학생운동의 순수성을 잃어갔다. 오늘날 한총련은 대법원에서 이적단체로 판결 받아 주사파 학생운동의 김정일 추종과 폭력성은 큰 우려를 낳고 있다.

 사회참여운동과 달리 복음주의 선교운동도 1950년대 말부터 캠퍼스에 나타난다. 영국에서 시작한 국제기독학생회(IVF)는 1956년에 한국에 세워져 성서적 세계관에 입각한 복음주의 문서 운동을 펼쳐 왔다. 미국서 시작한 대학생선교회(CCC)는 1958년에 한국에 세워져 국가조찬기도회를 1965년부터 정착시키며, 1971년 1월 1일부터는 민족복음화운동을 선포하고 ‘민족의 가슴마다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성령의 계절이 오게 하자’라는 표어로 1974년 EXPLO 여의도대성회와 제자운동인 ‘순’(筍)조직 전도를 펼쳐 한국교회의 부흥을 가져오는데 오늘날도 제자운동을 하는 교회들은 부흥하고 있다. CCC는 77년 민족복음화성회, 80년 세계복음화대회 등의 대형부흥집회를 열어 교회 부흥을 선도하나 사회참여파는 이런 부흥집회를 비판하여 1974년의 민청학련 사건과 여의도대성회는 기독학생운동이 진보와 보수로 구분되는 분기점이 된다. 이런 속에서도 민족복음화대성회는 현재도 지속되며 네비게이토, CAM, 한사랑선교회 등 각종 학생전도운동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학생운동은 새로운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어느새 초중고교와 대학은 복음의 불모지가 되어가고 있다. 미전도종족이 바로 우리 곁에 있는 청소년 대학생들이다. 사탄은 인터넷 미디어를 통해 청소년을 반기독교 전사로 키우고 한국교회를 기복신앙으로 침몰시키고 있다. 한국교회와 기독청년들이 개화기 선교사들과 한국 교회 선배들처럼 나라를 살리려는 구국신앙으로 다시금 성결된 삶의 실천을 적극적으로 보여 주지 못한다면 한국 교회는 소아시아의 초대교회들처럼 사라질 수도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격변하는 지구촌에서 전문인 선교사 시대를 맞아 개화기 선교사들의 정신을 본받고 교회학교에서는 복음적 역사교육을 강화하고 사회문제를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영적 분별력을 길러주며, 청소년을 교회의 중심에 세워 훈련시켜 미래 통일한국과 세계선교를 위한 ‘복음적 전문인’으로 키우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