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프랑스 남부지방에는 교회사적으로 볼만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 일반관광의 관점에서는 흥미 없을지 몰라도 프랑스 개혁교회 교인들에게는 성지와도 같은 곳들입니다. 예를 들면 꽁스땅스 성탑감옥(Tour de Constance), 뒤랑 생가 박물관(Musée du Vivarais Protestant), 광야 박물관(Musée du désert) 같은 곳은 한국의 장로교회 교인들도 한 번 쯤 가볼만한 곳입니다. 일반관광객들은 관심 가지고 찾아가지도 않는 곳을 찾아가고 있노라면 저절로 경건한 마음이 일어나고 그 자체로 어떤 자부심을 갖게 해줍니다. 옛날 개혁교도들이 복음적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영웅적으로 저항하고 투쟁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눈물도 나고 우리가 그런 신앙적 유산을 물려받았음에 대한 긍지도 생겨납니다.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개혁신앙을 지키며 죽어간 이들의 삶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 당시 목사들은 잡히면 모든 관절이 으깨지고 사지가 절단되며 마지막에는 많은 군중이 모이는 광장에서 참수를 당하거나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여자들은 탈출이 불가능한 높은 망대 탑 감옥에 갇혀 수십 년을 추위와 굶주림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남자들은 예외 없이 노예선으로 끌려가 배 밑창에서 손목과 발목에 쇠고랑을 찬 채 노를 젓다가 거기서 죽어야 했습니다. 수없이 많은 개혁신도들이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노예선에서 죽었습니다.

 

  18세기 프랑스에서 개신교 예배가 금지되고 개신교 예배를 드리기만 하면 교회는 파괴하고 신자들은 잡아가곤 하자 개혁교회 신자들이 사람들이 살지 않는 들판이나 산지에 비밀리에 모여 예배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역사적 현장과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만든 박물관이 광야 박물관입니다. 많은 전시품이 진열된 이 박물관 한 쪽 구석 벽에 조그만 조각 나무판 하나가 걸려있습니다. 거기에는 피골이 상접한 채 노 젓는 한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노예선에 끌려온 개혁신도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그림과 함께 새겨진 글귀가 너무나 가슴을 벅차게 합니다. 그 글을 우리말로 옮겨보면 이런 뜻입니다:

 

  “주님, 저로 하여금 제 손목의 쇠고랑을 주님과의 혼인반지로 삼게 하시고 제 발목의 쇠사슬을 주님께 묶인 사랑의 사슬로 여기게 하소서.”

  그는 고되게 노를 젓다가 죽는 것 외에는 달리 기대할 것이 없는 상황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자기 손목에 채워진 쇠고랑과 발목에 채워진 쇠고랑과 거기 연결된 무거운 쇠사슬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쇠고랑과 쇠사슬은 도저히 끊어버릴 수 없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그로 하여금 그 저주의 올가미 같이 보일 수 있을 쇠고랑과 쇠사슬을 주님과의 혼인반지요 주님께 자기를 묶어주는 복된 사랑의 줄로 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위대한 개혁신앙의 한 모습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개혁신앙의 후예들임을 자각하며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너무나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확신에 찬 아름다운 신앙고백을 떠올리며 새삼 감격하게 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함께 떠오르는 380장 찬송의 가사가 두고두고 가슴을 적십니다: “나의 생명 되신 주,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주의 흘린 보혈로 정케 하사 받아주소서. 날마다, 날마다 주를 찬송하겠네. 주의 사랑 줄로써 나를 굳게 잡아매소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께로 튼튼히 묶어주시는 사슬이십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그 사슬을 끊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그를 믿는 믿음으로 그 어떤 고난과 역경도 극복하며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흑인영가 중에 “나는 신발을 신었네. 너도 신발을 신었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신발을 신었네.” 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옛날 미 대륙의 흑인노예들이 부르던 노래입니다. 노예였기 때문에 신발을 신고 있지 않았던 이들이 부른 노래였습니다. 신발을 신지 않은 그들이 왜 “너도 나도 신발을 신었다.”고 노래했겠습니까? 믿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육신적으로는 천민노예였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누리게 된 영적 자유의 기쁨을 그들은 “신발을 신었다.”는 말로 표현하여 노래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11:1)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우리를 고통 속에 붙잡아매는 쇠고랑도 주님과의 혼인반지로 보이게 하고 주님께 묶인 사랑의 사슬로 보이게 해줍니다. 믿음은 자기의 맨발에 신겨진 신발을 보게 해주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누구도 끊을 수 없게 묶고 있는 사랑의 사슬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확인하며 감격과 기쁨과 감사와 찬미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