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문안교회 해외선교부(부장 노재영 장로)는 해외미전도지역 선교사역을 담당하는 부서입니다. 크게 보면 러시아, 동북아, 태국 등 현지지역에서 대규모로 사역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으며, 교회 내에서는 체한 외국인 예배를 통하여 우리나라에 여러가지 사정으로 와 있는 외국인을 위한 선교사역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많은 해외선교사역을 하고 있음에도 새문안 해외선교비젼이 일반 성도님들과 많이 공유되지 못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해외선교비젼은 2010년 7월에 있었던 새문안 해외선교 비젼 나누기 행사에서 담임목사님께서 명쾌하게 정의해주신 내용입니다. 우리교회 해외선교 비젼 방향은 크게 세가지인데, 첫째 교육선교입니다. 그 지역의 영적지도자를 세우는 사역인데, 태국기독사관학교와 볼고그라드, 블라디보스토크, 동북아에 신학교가 대표적인 사역입니다. 신학교 등 교육기관을 통하여 현지 인재들을 발굴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하고, 영적지도자를 세우고, 육성된 영적지도자들을 통하여 현지 지역을 복음화 하는 사역입니다. 둘째는 현지교회와 협력사역입니다. 각 지역마다 현지교회와 협력하여 활발한 사역을 진행하고 있는데,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현지교회와 충돌하지 않고 최대한 존중하고 협력하여 선교의 사역이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선교전략입니다. 셋째는 국내 체류하는 외국인 선교사역입니다. 베트남, 몽골, 중국인 예배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데, 해외로 나가서 선교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들을 복음화 시키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들에게는 무조건 잘해주어야 한다”라고 담임목사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교회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품격을 높일 것입니다. 외국인들이 새문안에서 극진한 환대를 받았을 때 그들이 돌아가서 그 지역에서 신앙을 유지하고 선교하는 열매가 맺을 것인데, 이미 일부 나라에서 그러한 열매들이 맺히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해외선교는 선교사님들의 사역뿐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새문안의 해외선교사역이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이면에는 많은 분들의 보이지 않는 수고와 눈물의 기도가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이러한 전폭적인 기도와 후원이 계속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언더우드 선교훈련원(원장 김주현 장로)에서 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저녁 7시에 저명한 강사님들을 모시고 교육관 지하1층 미션홀에서 선교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뜨겁게 전해 들으며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맞추고 있다. 오시는 강사마다 언더우드선교사의 교회에서 선교를 전할 수 있음만으로도 함께 감격 해하며 뜨겁게 전하고 있다.

  세상 속에 살아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을 살도록 일깨우는 귀한 시간을 통해 우리의 직업과 재정과 시간과 건강을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기 위해 사용할 기회를 만날 수 있다. 더러는 전도폭발 훈련과 겸해서 참석하기도 하고, 더러는 매 기마다 선교현지로 떠나기도 한다. 또 떠나는 훈련원 동기생을 후원하기도 하고, 사역 중인 선교사에게께 더욱 새로워진 마음으로 기도하고 후원하기도 한다. 또한 기도의 중요성을 절감하기에 모든 기도 모임에 더욱 뜨겁게 참여한다. 이와 같이 훈련을 받고 나면 여러가지 방법으로 선교에 동참하게 된다. 이번 7기 심화과정에는 52명의 성도가 기본과정에 이어서 7주간을 뜨겁게 찬양하고 기도하며 훈련하고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하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더욱 새롭게 하며 나아가는 발걸음들이 늘어갈 때,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확장될 것이다. “주님! 제가 선교사입니다!”

 

 

  1887년 9월 27일 새문안 교회가 창립되어 올해 123주년을 맞았다. 우리 교회로선 성전 건축과 새생명 운동을 적극 추진하고 있는 시점에 하나님이 기뻐하실 찬양대와 찬양사역 100년을 돌아보는 중요한 시기가 되었다. 새문안교회 찬양대는 1913년에 경성 대 전도대회에 동원된 것으로 당회록에 기록된 것에 의거하여 그 이전에 창단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김세한의 저서 배재 80년사에는 1910년부터 찬양대가 활동했다고 수록). 찬양대는 교회의 매주 예배의 찬양을 담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교회력에 의한 절기찬양, 개척교회 순회 찬양이나 선교찬양, 특별 음악회 등 찬양을 통해 복음을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해 왔다. 특히 해방 전부터 홍난파, 김영환 등 당시 한국을 이끌던 음악인이 활동하여 왔고 현제명, 한동일, 윤이상 등도 새문안을 거쳐 간 음악인이었다. 공식적인 찬양대의 창단은 1920년 12월 차재명 목사님이 부임하신 이듬해 6월 창단되었으며 초대 대장을 김영환 장로님이 맡았다. 6·25전쟁 후 1955년 강신명 목사님(4대)이 부임하셨고 1962년 9월 여전도회 찬양대(새나리 찬양대의 전신, 지휘 백화선 집사 음악부장 조병린 권사)가 창단되었다. 1970년 8월에 대학생회 찬양대(지휘 심성식, 학생대장 민경찬)가 발족되었으며 2년후 1972년 2월에 청년찬양대(한기림찬양대의 전신, 대장겸지휘 천병화 집사)가 창단되었다. 80년 12월 7일 본 성가대원 중에서 지원한 성가대원과 신입대원을 모집하여 1부찬양대(대장 안종호 장로 지휘 최종민집사)가 창단되어, 81년 1월 3일 19명으로 출발하였으며 81년 1월 11일부터 1부 성가대라는 공식 명칭이 결정되어서 오늘의 새로핌 찬양대에 이르렀다.

  1981년 9월 6일부터 4부 예배를 드리게 되어 1982년 1월31일 1부 찬양대(현 하나찬양대 대장 임급주 장로 지휘 주정식 집사)가 창단되었다. 찬양대 이름은 1984년 2월 5일에 현재의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2010년 현재 지휘자와 반주자는 다음과 같다.

  하나: 제일, 하나가되자 (지휘: 고성호 오르간: 정은선)

  새로핌: 새로피어남, Seraphim(천사) (지휘: 김성봉 오르간: 임성은)

  예본: 정통교회 음악을 추구함 (지휘: 최훈차 오르간: 백금옥)

  새온: 새문안의10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 (지휘: 김경희 오르간: 박신현)

  한기림: 하나님을 한소리로 기린다 (지휘: 박선미 오르간: 장연진)

  새나리: (1997년 1월) (지휘: 송현상 오르간: 이성심)

  새남: (2001년 12월) (지휘: 김인호 오르간: 노인선)

 

  교회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5부 예배로 개편됨에 따라 1987년 2월 7일 새온찬양대(대장 강상복 장로, 지휘 박종현 집사)가 창단되었다. 2000년 1월 남성 찬양대를 구성(대장 서원석 장로, 지휘 신영정집사)하였으며 2000년9월17일 이수영 목사님 부임 후 2001년 1월 정식 찬양대로 승인하여 12월 새남이란 이름을 새로 갖게 되었다.

 

  주요음악회

 1963년 4월 22일 부활절 기념음악회 (지휘: 주장돈)

 1977년 9월 25일 창립 90주년 기념음악회 (지휘: 서수준 곡명: 하이든의 천지창조)

 1987년 9월 27일 창립 100주년 기념음악회 (지휘: 최시원 곡명: 멘델스죤의 사도바울 장소: 이화여대 강당)

 1989년 11월 6일 창립102주년 기념음악회 (지휘: 박종윤 멘델스죤의 엘리야 장소: 세종문화회관)

 1992년 9월 5일 창립105주년 기념 음악회 (지휘: 고성호 곡명: 하이든의 천지창조 장소: 세종문화회관)

 1995년 9월 27일 창립108주년 기념 음악회 (지휘: 최동규 장소: 횃불선교센터)

 1997년 11월 8일 언더우드 한국선교 110주년 기념음악회 (지휘: 최홍락 곡명: 헨델의 이집트의 이스라엘인 장소: 세종문화회관)

 2001년 12월 28일 메시아대연주회 주관 (지휘: 김경희 장소: 세종문화회관)

 2002년 9월 1~10월 6일 창립 115주년 경축 음악회(새문안솔리스티, 채리티앙상블, 새나리, 한기림, 하나, 새남, 예본, 새로핌, 새온 순서로 연주함)

  2007년 교회창립 120주년에는 언더우드선교사가 개척한 능곡, 양평동, 신사동, 시흥, 김포제일, 서교동 7교회에 방문예배를 드렸으며 자매교회들도 새문안교회를 방문하여 답방예배를 드렸다.

 

  새문안의 주요 음악인

 1. 김인식(1885~1963) : 최초의 양악 음악가

 2. 이상준(1884~1948) : 창작음악의 개척자

 3. 김영환(1893~1978) : 최초의 피아니스트

 4. 홍난파(1898~1941) : (본명 홍영후) 근대 양악의 상징

 5. 김형준(1885~ ? ) : 최초의 예술가곡 "봉선화" 작사자, 성악가

 6. 김원복(1908~2002) : 최초의전문피아니스트

 7. 홍성유(1908~1936) : 최초의 부부음악가(김원복) 바이올리니스트, 홍난파의 조카

 8. 독고선(1899~ ? ) : 피아니스트, 음악지도자

 9. 최성두(1909~1981) : 최초의 레코드사 설립자 (찬양대 지휘자)

 10.장수철(1917~1966) : 작곡가, 지휘자

 11.최시원(1937~1990) : 성악가, 지휘자 (찬양대 지휘자)

 

  새문안교회언더우드기념한국교회음악교육원

  새문안교회 언더우드기념 한국교회음악교육원은 1998년 2월 2일 개원하여 3월 13일부터 수업을 시작하였다. 설립목적은 1894년 한국찬송가의 효시가 되었던 <찬양가>를 편찬한 언더우드의 교회음악에 대한 공적을 기념하고 한국교회의 질적향상을 도모하며 교회의 예배에 음악을 담당할 지도자들과 찬양사역자들에게 이론과 실기를 지도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새문안 음악교육원은 꾸준히 발전하여 명실공히 한국교회음악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이미 1만명이 넘는 수강생들이 음악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개교회에서 주님을 찬양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다. 교회음악과정은 크게 4개의 전공과정을 두고 있다. 지휘, 성악, 피아노, 오르간 전공으로 나누고 이것을 다시 기초과정 전문과정 고급과정으로 나누어서 교육한다. 실기교육뿐만 아니라 교회음악 이론을 교육하여 교회음악에 바른길을 제시한다. 그 이외에도 찬송가 반주반 시창발성을 교육하는 특별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지금까지 음악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많은 선배 음악인들과 성가대원 그리고 이 찬양사역에 협력한 모든 새문안교우들에게 감사드리며 주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드린다.

 

 

  2010년의 [내 집을 채우라]는 표어에 맞추어 홍보출판부(부장 김형일 장로)에서는 연중 주제를 “전도하는 교회, 살아있는 교회”로 정하고 편집방향도 모든 내용은 오직 성경을 중심으로 먼저 성도님들이 기다리고 사랑이 넘치는 책으로서 성도들의 믿음과 영적성장을 이끌어 주며 국내외 선교현장을 취재하여 하나님나라가 확장되는 현장의 소식을 생생히 전하는《새문안》지가 되도록 정했다. 홍보출판부 모든 부원들은 언제나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지면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땅 끝까지 이루게 하는데 온 힘을 다하고자 한다.

 

  편집방향 :

  1) 새문안교회의 개혁신앙을 홍보한다.

  2) 성도들에게 개별적으로 다가가는 교회의 모습을 보인다.

  3) 다양한 행사 소식과 신앙성숙을 위한 성경공부를 안내한다.

  4) 신앙 간증을 실어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을 격려한다.

  5) 교계의 주요 행사와 기사를 선별 게재한다.

  6) 기독교 신앙 안에 올바른 국가관 확립교육 (청소년층 대상)

 

  주요 문서선교 업무 :

  1) 《새문안》와《e 새문안》발간

  2) 요람 발간

  3) 연간달력 발간

  4) 문예창작대회 등

 

  새문안교회의 문서선교 사명은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홍보출판부는 오늘의 새문안교회 현장을《새문안》지에 기록하는 책임이 있으며, 교회 내외의 중요한 사건과 신앙안내를 교우들과 세상에 전해야 한다. 그러기위해 새문안교회의 중요한 정체성인 역사성을 문서로 정리하고 이를 한국 개신교회의 모범으로 제시하는《새문안》지는 새문안교회 성도 여러분들이 만들어 가는 책이 되어야 한다. 홍보출판부는 새문안교회의 얼굴이다. 홍보출판부에서 발행되는 인쇄물들을 내실 있고,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가기 위하여 성도들에게 언제나 지면은 준비되어 있다. 자신들 삶의 현장과 일터에서 간증거리와 주위에서 함께 나누고 싶은 기사거리가 있으면 언제든지 홍보출판부로 연락주시고 함께《새문안》지를 만들어 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새문안교회도 컴퓨터 시대를 배경으로 홈페이지를 구축하고 있지만 아직 시설 면에서 완벽히 갖춰지진 못했다. 영상선교부(부장 김동배 집사)가 해야 할 일은 참 광범위하다. 교회건물이 신축되고 나면 시설분야의 더 많은 부분과 인원도 보강해서 시대에 발맞춰 선교와 전도의 방향을 다시 개편해야 할 것이다. 지금도 새문안교회의 홈페이지는 새문안 교인을 위한 발언대이며 신앙의 발걸음을 안내할 수 있는 분야로 발돋음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몇몇 중요부서와 관심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직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선교와 전도에 앞장서야 할 일이면서 배경만 되고 있다.

  그럼에도 각 행사에서 영상의 필요성은 빛을 발한다. 강의 때도 설교에서도 미디어의 활약은 대단하다. 여기저기서 설교 자료 등 자료를 앉아서 찾고 만드는 일에도 인터넷은 대단한 공로자이다. 새생명 운동과 전도부 활동, 특히 전도를 위해서도 영상은 꼭 필요하다. 이렇게 쉬운 선교와 전도의 보조 자료를 가지고도 활용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면 역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만물의 영장이 되어 만물을 지배하라”고 하신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미디어 선교의 필요성은 누구나, 모든 사람이(신자. 비신자) 자유롭게 볼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교회는 교회로서의 사명을, 올바르게 하여야 할 것이다.

  또 새문안교회는 새문안교회다운 프로그램을 계속 구축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다른 기관의 미디어 센터만큼은 못되더라도 <미디어 센터>의 구성의 중요성도 배제해서는 안된다. 현재 시설로도 자료보존에 많은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책임을 맡은 몇 사람의 것이 아니고 새문안 교인 모두의 얼굴이 되고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올해 시작하면서 많은 것을 구상하고 시도했으나 제대로 되지 못한 것 같다. 새해에는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고 제대로 활용하여 새문안 교회다운 미디어 선교에 앞장설 수 있는 기획이 구축되었으면 한다.

 

 

  교회사료관(관장 윤석현 집사)은 새문안교회의 대표적 특징인 역사성을 가장 잘 나타내고 홍보하는 곳이다.매년 교회 창립월인 9월 즈음에는 특별 기획전시를 기획, 마당전시와 부속 행사를 진행하며 이어서 10월에는 서울역사박물관이 주최(서울시 지원)하는 새문길 박물관 연합 축제에 참여하고 있다. 또한 역사 강의 진행과 도슨트 배출, 새문안 화보 CD발간 등 꾸준한 사업을 통해 새문안교회의 역사를 알리는데 주력하고 있다. 교회사료관에서는 교인 뿐 아니라 외부 단체와 기관, 비기독교인까지도 염두에 두고 관람안내 및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방학 기간에는 학생들이 많이 방문하는데 지금으로선 미션스쿨과 신학대학이 주를 이루지만 꾸준한 사료관의 발전을 통해 종교를 초월한 역사 전시관으로서의 기능을 할 날이 올 것이다.

 

[개관 이후 관람객 통계]

 

  교회사료관에서는 다양한 정보 서비스가 이뤄지는데, 기본적으로는 교회 역사 및 각종 사료관련 자료가 제공되며 한층 더 나아가 사료 조사를 통한 통계자료산출, 언론 보도용 자료 및 촬영 협조, 신학교·종교 수업 협조 등이 있다. 또한 자료 데이터베이스화를 통해 활용성과 편리성을 꾀하고 있다. 현재 당회록, 교인세례명부, 유아세례명부, 혼인·별세자명부, 역대 담임목사 설교 변환(1979~1999)이 되어 있거나 진행 중이며 이를 통해 다양한 컨텐츠 개발도 가능하다. 올해(2010년)에는 기존 교회홈페이지에 포함되어 있던 교회사료관 홈페이지를 새로이 만들어 교회사료관 홍보 효과를 높이고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배려했으며, 게시판에서 각종 인문학적 정보와 자료를 제공 중이다. 새문안교회 교회사료관은 국내 개교회 역사자료관으로서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어 관련 사업을 기획 중인 많은 교회 담당자들의 방문과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카페, 공연장, 도서관 등을 통해 지역사회 주민을 포용하려는 문화선교가 중요시 되는 이 때에, 새문안교회 교회사료관은 가장 우리의 특징을 잘 살린 좋은 선교 기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새문안교회 의료선교부(부장 이찬영 집사)는 의료사역을 담당하여 선교와 전도를 수행하는 부서로 1982년 사회부내에 의료봉사회를 설치하여 국내활동을 시작한 이후로 1992년 태국 카렌족 주민을 대상으로 첫 해외의료선교를 시행하였으며 연 2~3회 20~40명 규모로 매회 2,000명 내외의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매월 첫째, 셋째 주 교회내에서 교인의료 상담과 몽골, 베트남 등 외국인근로자를 대상으로 진료를 하고 있으며, 매월 동두천 태국인·캄보디아인 교회 , 격월 의정부 터키, 우즈베키스탄인 교회로 방문진료를 하고 있고 양주 다문화센터로 방문진료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매년 대학부 여름봉사활동을 벌이는 지역에서 의료지원도 하고 있으며, 의료팀은 내과, 정형외과, 성형외과, 일반외과, 신경외과, 안과, 소아과, 산부인과, 피부과, 이비인후과, 한방과, 치과, 간호, 약국, 이미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계선교 역사상 한국에서만 볼 수있는 특이한 현상은 선교사의 입국에 앞서서 자국인에 의해 성경이 번역, 보급되었다는 점이다. 1882년 만주 심양에서 스코틀랜드선교사 로스 목사와 한국인 번역자들이 스코틀랜드성서공회의 지원을 받아 최초의 한글성서를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이 번역된 성서를 번역에 참여했던 서상륜이 몰래 숨겨 들어와 보급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가 1884년에 설립된다. 한편 임오군란때 민비를 구한 공으로, 1882년 일본에 선진문물을 시찰하기 위해 건너간 이수정이 기독교에 입문하면서 미국성서공회 일본지부 총무인 루미스의 제안으로 마가복음을 번역하여마침내 1885년 2월에 일본에서 출간하게 된다. 이 성서는 마침 한국 선교를 위해서 잠시 들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게 전달되어, 최초의 공식 선교사가 한국 땅에 입국하면서 피선교지인이 번역한 성서를 갖고 들어오는 특별한 경험을 갖게 된다. 이렇게 한글성서 번역과 출판이 선교사 도래 이전에 이루어지면서 복음 선교활동이 신속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경전을 중요시하는 전통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를 수용하였을 때에 한글성경에 대해 특별한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 한글성경 번역은 우리말을 한글로 정착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한글을 대중의 글로 만드는 데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하층민과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했던 장로교는 민중의 문자로 번역된 한글성경을 가짐으로 복음전도에서 한국 백성들과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선교사의 도래에 앞서 번역, 출판된 성경은 일찍부터 한국의 민중 속으로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성경반포사업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된 이면에는 권서들의 숨은 봉사활동이 있었다. 한국교회 초창기 선교사들이 들어가지 못하는 산간 벽지와 농촌, 섬마을을 다니면서 성경을 반포하며 복음을 전한 권서들은 주로 무신론자들을 목표로 성경을 보급하였는데, 복음서, 사도행전, 잠언 등을 1백 내지 1백 50권을 묶어 등에 지고 전국 방방곡곡을 다녔다. 그들은 서너 주에서 몇달 동안 산을 넘고 들을 건너면서 마을들을 찾아 다녔는데, 맹수의 위험과 폭풍우 그리고 굶주림과 싸워야 했다. 권서들은 부락에 들어가서 한 집에부터 끝까지 모든 집을 방문하였다. 어떤 마을에서는 환영을 받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매우 드물었고, 대개의 경우에는 모욕과 학대를 받았다. 권서들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돈이 없다”, “읽을 줄 모른다”라는 대답을 반복하여 들어야만 했다. 그래서 권서들은 문맹자가 성경을 살 때, 그 사람에게 주기 위하여 인쇄된 한글 자모를 가지고 다녔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방법으로 읽는 것을 배우게 되고 이렇게 해서 성경을 읽으면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돈이 없을 때에는 권서들은 성경과 물물교환으로 계란, 쌀, 짚신 등을 받았다. 권서들의 노력에 의해 한국에서는 성경이 뚫고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권서들이 반포하는 성경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그래서 성경이야말로 한국에서 복음화에 가장 두드러진 요소로 지적되었다. 한국교회 초창기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도 권서의 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근처에 교회가 없는 산간지방이나 외딴 지역에서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게 된 경우, 권서들은 그 지역에 적당하게 모일 장소를 마련하고 모임을 인도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자라서 교회로 발전했다. 최봉석 같은 능력있는 목사나 주남선 같은 신사참배 반대투쟁의 선봉자들이 권서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초기 선교 사업의‘최전방’에 서 있던 권서들은 한국교회사에서‘빛도 없이’‘이름도 없이’헌신했던 선구자들이요, 한국교회 창건자들이었다. 성경이 광범하게 반포되자 한국의 초대 기독교공동체에서는 성경을 읽기 위해서‘국문운동’운동이 일어났고 ‘사경회’(査經會)라는 이름의 성경공부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사경회 운동은 1903년과 1907년의 한국의 부흥운동을 가능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제하에서도 한국의 부흥운동을 지속적으로 가져오게 하였고, 해방 후 오늘날까지 조직적인 성경공부가 한국교회 성장의 토대가 되었다. 성경이 한국에서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를 인식한 선교사들은 한국기독교인을‘성경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 (Bible-loving Christian) 혹은‘성경을 사랑하는 자’(Bible lover)라고 불렀고, 또 한국의 기독교를 ‘성경 기독교’(Bible Christianity)라고 언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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