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찬송가에 실린 곡들이 대부분 서양곡인 점을 안타까워하여 한국적 가락과 리듬의 찬송을 작곡해야겠다는 소망을 품고 이를 실천한 음악가가 있다. 바로 기적의 음악회라고 불린 1974년도 <74 서전 메시아 대연주회>에서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150여개 교회로부터 모인 1000명의 합창대를 지휘한 고(故) 이동훈 교수(1922~1974)이다. 그는 독학으로 바이올린을 공부하고 18세에 동경국제음악학교 본과 기악부에 입학했다. 해방 후, 월남하여 피아니스트와 결혼하고 영락교회 초대 지휘자가 된다.

  외국찬송가를 번역해 한국에 소개하는 일도 했지만 언제나 그의 마음엔 우리나라사랑을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에게 전할 찬송가 작곡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1967년도판《개편찬송가》에 실린 10인의 한국인 작곡자들 중에서 가장 많은 다섯 곡이 수록되었고, 곽상수(4곡), 박태준(3곡), 장수철(2곡) 등등과 함께 한국적 찬송가 작곡에 매진했다. 복음 증거와 신행일치의 삶을 음악선교를 통해 증거한 이동훈 교수는 1922년 5월 26일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아버지 이기혁 목사와 어머니 최경신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기혁 목사는 당시 남산교회목사로 시무했고 훗날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장(1963년)을 지냈다. 바로 부친인 이목사로부터 민족 복음주의 정신을 물려받았으며, 어머니 최경신 사모로부터는 강직하고 절대 남의도움을 바라지 않는 성품, 그리고 남을 무조건 믿고 도와주는 성품을 물려받았다고 전한다.

  “참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귀한 믿음, 맑은 정신의 소유자였지요.”1940년에 떠난 동경 유학생활을 4년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와 많은 반대를 이겨내고 결혼한 아내 김병숙 권사의 회고이다. 용암포 제일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 지 겨우 9일 만에 학도병 신체검사를 위해 평양으로 가야했으나 음악을 전공한 덕에 학도병으로 끌려가는 일은 면했다고 한다. 1919년 3월 1일.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한 만세운동이 기독교계 주요 인사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그 3년 후에 태어난 이동훈. 어둡던 일제강점기에 10대,20대 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그가 신의주 고보 재학 중에 신사 참배를 끝까지 거부한 유일한 학생이라는 얘기는 유명하다. 일제가 대동아전쟁에서 패배하면서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에 해방이 왔다.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역사에 어둠 짙었을 때에

  게명성 동쪽에 밝아 이 나라 여명이 왔다

 

  이동훈이 작곡해 1967년《개편찬송가》에 실린《새찬송가》582장 1절의 앞부분이다. 작시는 김재준(1901-87)선생이 맡았다. 외롭지만 믿음을 지키며 신사창배를 거부하는 의의 길을 택했던 “역사에 어둠 짙었을 때”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동훈이 맞은 해방은 누구보다도 소중하고 새로운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빛 속에 새롭다

  이 빛 삶 속에 얽혀

  이 땅에 생명탑 놓아간다

 

  이 가사를 들고 이동훈은 얼마나 감격했을까. 이 가사에 꼭 맞는 가락을 찾기에 이동훈 교수는 전혀 주저함이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음악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품고 사랑하는 아내도 뒤로 한 채, 한국에서 일본으로 중국으로 그리고 서울로 일을 쫓아다니느라 집을 떠나 있어야 했다. 그러다가 3.8선이 가로막혔고, 아내 김병숙은 당시 한 살이던 장남 수철을 등에 업고 눈이 펑펑 쏟아지는 12월 말, 안내자를 따라 집을 나섰다. 아기가 제발 울지 않게 해달라고 속으로 속으로만 눈물의 기도를 드리며 삼팔선을 넘어 새해 1월 2일 밤, 서울역에 도착해 기적적으로 남편과 상봉했다. 그리고 6.25동란. 천막 속에서 생활 했던 민족 상잔의 비극적인 전란의 시기. 이동훈 교수는 이 시기에도 절대 지휘봉을 놓지 않았다. 바로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을 위해서였다.

 

  가슴마다 파도친다 우리들의 젊은이

  눈동자에 어리운다 우리들의 푸른 꿈

  주의 말씀 주의 행함 길과 진리 되시니

  우리 평생 한결같이 주만 따라 살리라

 

  풍전등화 같은 처지에 놓인 슬픈 나라. 그러나 우리에겐 언제나 미래를 이끌어 나아갈 젊은이들이 있었다. 이 찬송가 역시 이동훈이 작곡해 1967년《개편찬송가》에 실리고, 《새찬송가》에 574장으로 실린 곡이며 작사는 같은 해에 반병섭 선생이 썼다. 우리들의 젊은이들이 품은 꿈으로 인해 희망을 본 이동훈 교수는 삶의 올바른 길과 진리가 곧 복음에 있음을 알기에 “우리 평생 한결같이 주만 따라 살리라”는 서원에 이 힘찬 곡조를 붙일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 고백을 손수건에 눈물로 “하나님께서 요셉의 눈에서 흐르게 하신 눈물을 내 눈에서도 흐르게 하셨다”고 기록해 자녀들에게 남긴 적도 있다. 진정 후손들에게 남겨 줄 가장 큰 유산은 “하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질 때까지/ 몸과 마음 다 바쳐서 주 뜻대로 살리라”는 격려였으리라. 그래서 반병섭의 가사는 이동훈의 곡으로 더 이상 힘찰 수 없으리만큼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는 젊은이들의 찬양으로 완성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있는 자리에서 믿음으로 나라를 위한 일을 할 수 있다. 총을 들고 나아가 적과 교전을 하는 임무도 나라사랑 없이는 어렵다. 큰 사업을 해서 물질적으로 나라를 돕는 일도 나라사랑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각자의 은사대로 지금 속한 곳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일을 착하고 충성되이 하는 일도 나라사랑이다. 이동훈 교수는 천재적인 음악성을 복음전파 사명을 바탕으로 나라를 위해 사용한 대표적인 예이다. 평생을 주님 찬양하기를 기뻐해, 감사함으로 지휘하고 음악을 지도한 이동훈 교수는 결혼생활 30년이 된 1974년 11월14일 합창 지휘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바로 집근처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작시하고 작곡한 찬양“네가 주를 사랑하나”(<이동훈 작곡집: 여호와는 나의목자> 1999년, 기독교음악사 간, 40면)에서 고백한다. “주여 내가 당신을 잊을 수 있사오리까/ 주여 내가 언제나 주를 사랑합니다”라고. “찬양하라”(1999: 42)는 곡에서는 “소리높여 찬양해 그 크신 행적과...사랑과... 위엄과 그 은혜를....“이라 선포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나라사랑은 곧 주를 믿는 믿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믿음의 선율이 있는 나라사랑을 실천한 이동훈 교수와 같은 영원히 젊은 영혼을 지닌 수많은 청년들이 새문안에 가득가득 차기를 기도한다.(고 이동훈 교수는 에스더선교합창단 지휘자로 헌신하는 김병숙 권사와 사이에서 이수철 장로, 이수영 새문안교회 담임목사, 이정희 권사, 이정옥 사모 이렇게 2남 2녀를 두었다: 편집자주) [e-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