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추적? 신흥종교 홍보?

  작년 10월 6일 SBS <뉴스추적> 566회에서는 “통일교 납치 감금 사건 [키요미 13년만의 귀향]”이라는 제목의 방송을 내보냈습니다. SBS방송 홈페이지 다시보기 코너에 지금도 있는 이 방송에 대한 예고 중 일부분을 인용합니다.“한국에서 태동한 신흥종교인 통일교 내부에 강압적인 납치 감금사건이 지속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충격을 주고 있다. 납치 감금의 피해자는 주로 한국인과 결혼한 일본인 부인들.”

  여기까지의 내용만으로 많은 언론 매체들이 이 방송에 대한 예고 기사를 쓰면서 새롭게 드러나는 통일교의 범죄행위에 대한 방송이라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예고 내용만 보면, 일본 여인들이 신흥종교에 속아서 한국인과 결혼해서 한국에서 살면서 납치 감금되고 있는 사건을 보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실제 방송에서는 반대로 통일교 교인들이 피해자이고 기독교가 가해자인 것처럼 보도하였습니다. 그것은 이미 방송 예고 안에서도 내비치고 있었습니다. 앞에서 마치 통일교 내부의 “강압적인 납치 감금사건”인 것처럼 쓰고서는 바로 이어서 이렇게 예고하였습니다.

  “이들[한국인과 결혼한 일본인 부인들]은 일본 내 가족들과 가족을 앞세운 일부 기독교 목사 등 배후세력이 연계된 방대하고 조직적인 납치 세력에 의해 강제 감금된 채 개종과 폭력을 강요당하는 등 인권을 유린당하고 있다.”

  즉,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 통일교 여성교인들의 인권을 기독교가 조직적으로 유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방송에서 납치를 일삼는 “일부 기독교 목사”로 보도된 시미즈 요시오 목사와의 인터뷰를 실은 <현대종교>(2011년 6월호)에 따르면, 그는 일본 통일교 전문가의 조언을 구한다고 해서 취재에 응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방송에서는 “그의 인터뷰 내용은 터무니없이 편집”돼 있었으며, “그는 일본 통일교 신도들을 납치해 개종과 폭력을 강요하고, 신도들의 인권을 유린하는 기독교 목사로 묘사돼” 있었습니다. 통일교를 비판하는 보도가 아니라 오히려 “인권”의 이름으로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이 <뉴스추적>의 주된 의도였습니다.

 

  이 방송이 이렇게 통일교 전문가와 기독교를 인권 침해자들로 만든 것도 문제이지만, 방송에는 더욱 심각한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방송의 심각성은, 새로운 통일교 후계자로 부각된 문형진(문선명의 7남)의 인터뷰와 설교를 상대적으로 길게 내보내어 그를 공개적인 통일교의 실력자로 세상에 공표하면서, 통일교가 더 이상은 “참가정운동”운운하는 이름으로 기독교계의 직접적인 시선을 피하는 데서 벗어나서 “통일교”라는 이름을 드러내놓고 사용하겠다는 공격적인 자세를 그대로 보여 준 데 있습니다. 최근 일부 매스컴에서 “왕자의 난”이라는 이름으로 문선명의 아들들 사이의 내분을 전하며 그것이 통일교의 위기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도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활발하게, 아니 공격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통일교입니다. 통일교 2세대들은 1세대들이 꿈꾸던 통일교인임을 드러내는 삶을 살고 있다고 스스로 감격해 하고 있습니다.

  문형진을 앞세워 하나의 종교로 인정받으려 온갖 매스컴을 동원하고 있는 통일교뿐만 아니라, “새언약 유월절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서 죽은 교주 안상홍 대신에 그의 아내 장길자를 소위 “어머니 하나님”으로 믿는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구, 안상홍증인회), 신학을 무료로 가르쳐 준다는 것을 미끼로 삼은 신천지 등이 최근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이단들입니다. 물론 성락교회(김기동), 만민중앙교회(이재록), 천부교 계열의 이단들(천부교, 한국기독교에덴성회 등)이나 구원파(권신찬, 이요한, 박옥수, 서달석) 등도 여전히 교세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인가?

  이러한 이단 신앙이 왜 문제입니까? 지면상 자세히 논할 수 없기에 일반적으로만 말한다면, 그것은 이단신앙이 기독교에 대한 공격이기 때문이며, 또한 가정과 개인의 삶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공격이라는 측면은 다시 반기독교정서 확산과 신앙의 왜곡의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로, 이단 신앙은 사회에 반기독교정서를 확산시킵니다. 기독교와 관련된 이단들의 활동은 타종교인이나 종교 없는 이들에게는 기독교 내부 활동으로 인식됩니다. 그래서 가끔씩 등장하는 이단사이비종교의 일탈(예: 재림주라 주장하는 정명석에 의해 신앙의 이름으로 자행된 성폭력)이 세상에는 기독교의 타락으로 전달되며 유사한 사건들과 얽혀서 기독교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특히 기독교와 관련된 이름들을 사용하는 이단들에 대한 확실한 대처를 소홀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뜩이나 기독교 자체에서 일어난 비리와 잘못들로 인한 비판이 강한 지금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이단에 대한 엄정한 대처와 함께 기독교 자체에서 나타나는 잘못들을 지속적이고도 적극적으로 고쳐나가는 개혁이 함께 진행되어야 함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둘째로, 이단신앙은 신앙을 왜곡시킬 수 있습니다. 이단들이 교묘하게 왜곡시킨 교리들은 결국은 예수님을 유일하신 구원자라고 고백하는 기독교의 복음을 왜곡시켜, 근래에 죽었거나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을 구원자로 믿게 만듭니다. 박태선(전도관, 천부교), 안상홍(안상홍증인회, 하나님의교회), 문선명(통일교), 이만희(신천지), 장길자(하나님의교회), 정명석(JMS) 등이 각각 하나님, 참부모, 보혜사, 어머니 하나님, 재림주 등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단이라 박해받지만 자신은 그 모임 안에서 참 사랑을 발견했다고 믿게 된 이들이, 밖에서 보면 전혀 믿을 수 없는 인물을 믿고 맙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런 왜곡된 믿음을 갖게 된 이들 중 상당수가 기존 교회에 출석하던 사람들입니다. “비유풀이”라는 교묘한 말장난과 참된 사랑으로 느껴지는 따뜻한 인간관계가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상처받은 이들의 신앙을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성경은 다른 이름[사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0-12) 그러나 이단의 가르침에 한 발 한 발 다가가다 보면, 어느새 그 다른 이름을 메시야로 또는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 곁에 아무 거리낌 없이 함께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단이 주는 셋째 위험은 가정과 개인의 삶의 파괴입니다. 노골적으로 재산헌납을 강요하거나 성적 일탈을 자신들의 교리 전파의 방편으로 삼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단 신앙을 따르는 이들의 삶은 지금도 여전히 일반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먼저 부모와 자녀 관계에 문제가 생깁니다. 대학생들이 이단에서 가르치는 성경공부를 하고서는 집을 나와 같은 신앙인들끼리 모여서 지내면, 부모도 함부로 집으로 데려 올 수 없습니다. 성인이 자발적으로 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안타까워 물리적 방도를 사용할 경우에는 부모라도 사법 처리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일로 인해 자녀가 부모를 형사고발해서 재판까지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예수님께 대적하는 이단 신앙을 위해 적용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기독교의 대응은 아직은 미흡한 듯 보입니다. 말 머리에서 이야기한 <뉴스추적>에서 SBS가 통일교를 옹호하고 기독교를 비판하는 근거 역시 이것입니다. 부모라 하더라도 이단에 빠진 성인 자녀를 억지로라도 데려 가는 것은 인권침해라는 논리입니다. 가정이 파괴되는 것을 보면서도 예전처럼 가부장적 질서를 내세우지 못하는 현 사회 상황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합리적이고도 효과적인 대처방안을 세우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이단에 빠지는 일은, 폭력(성폭력을 포함한)의 대상이 되는 극단적 사례를 포함하여 여러 면에서 개인의 삶에도 악영향을 끼칩니다. 이단에 속해 있는 동안, 그는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사회와 가정과 기독교의 거부감과 반대를 “참 신앙”과 참 신앙인들을 향한 박해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박해받는” 자들끼리의 동질감과 유대감은 그 집단의 결속력을 강화시키는 동시에 구성원의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사회로부터의 격리를 교리의 이름으로 강요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발적으로 스스로 가정과 사회로부터 멀어집니다. 학생들은 완전히 학업을 중단하거나 등한히 하게 되며, 직장인들은 ‘박해받는 자의 열심’으로 직장을 포기하거나 소홀히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정상적인 사회로 돌아오는 일이 힘들어지며 돌아오더라도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짊어지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는 우리 곁에 슬쩍 다가오는 이단을 올바로 분별해내야 합니다. 이단이 접근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성경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독특하고 새로워 보이는 성경공부로, 신비한 것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기적과 이사로, 상처받은 이에게는 따뜻한 대화로 다가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 모두가 이단의 공격 대상입니다. 그러니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그런 데 안 빠져!’ 했지만, 어느 순간 자신이 그 한 복판에 있음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역자들은 목사가 되기까지 여러 해에 걸쳐 신학적 훈련을 하였습니다. 여러 해 동안의 교회 사역을 통해 이단에 대응하는 경험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기존의 가르침이나 신앙생활과 다른 것을 말하거나 보이는 이들이 주변에 있을 때에는 바로 교역자들에게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영적인 갈망은 교회의 신앙생활 안에서 충족시켜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 안에서 기도하고 찬양하며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특별 집회나 교회 밖의 성경공부는 교회가 인정하는 것인지를 먼저 확인한 다음에 참석하는 것이 좋습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상처를 입었다고 느낄 때라도, 교회 안에서 그 상처를 치유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단에 빠졌다가 돌아온 이들 중 상당수가 이단이라 정죄 받는 그곳에서 오히려 사랑과 위로를 얻었다고 말합니다. 급속한 산업화로 사랑의 요람인 가정이 깨어졌으며, 깨어지고 있기에 사람들에게 사랑의 결핍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이단이라 박해받는 자들이 함께 갖는 유대감을 사랑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리고 이단에 이미 빠진 이들을 돌이키기 위해서는 사랑과 위로의 출발지인 가정 공동체가 바로 서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인 개인과 교회는 이단들의 유혹과 공격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바른 신앙의 가르침을 따라 성경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이단에 대처해야 합니다.

 

  “...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에베소서 6:10-12)  [e-새]